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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스피노자-앎은 능동성을 찾아준다.

by 흠지니어 2021.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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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우리를 능동적인 상태에 있게 하는가? 어떻게 이해를 통해 수동은 능동으로, 결국에는 슬픔을 기쁨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는가? 그런 이해가 실천이 아닌 이론과 관련되어 있는 한 오히려 반대로 앎과 이해가 수동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응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앎은 이해하려는 것에 순응하기 위해 모든 동기와 주도권을 유보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모든 유약함, 인간의 비참한 조건과 관계되는 앎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기보다는 오히려 슬픔을 주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은 앎에 대한 매우 잘못된 개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응답할 것이다. 사물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 즉 적합하게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어떻게 다룰지, 대상의 자극에 어떻게 대응할지, 대상을 어떻게 포용할지를 안다는 말이다. 진정한 앎은 우리의 진정한 필요에 부적합하게 사물의 어떤 측면을 자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한 앎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해당 사물의 적합한 관계를 아는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을 좀 더 탐구해보기로 하자. 높은 산의 암벽을 타고 넘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 암벽을 타는 기술을 배우지 않는 것은 곧 암벽에서 미끄러지지 않은면서 암벽을 타는 방식을 모른다는 것과 같다.
  • 그렇게 되면 분명히 치명적일 추락 상태가 되며 산의 힘에 줄곧 지배당하면서 결국에는 그 힘에 패배하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신체를 알고 그 기능을 이해한다고 상상해보자.
  • 우리는 어떻게 신체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알고 근육의 위치를 안다.
  • 이는 결국 신체의 어느 지점에 힘을 주어 균형을 잡을지를 알고 있는 것과 같다.
  • 그리고 다른 한편 우리가 암벽을 이해하고 있다고 해보자.
  • 우리는 암병의 단층과 돌출부, 견고함과 구조를 안다.
  • 신체와 암벽에 대한 이런 이해를 통해 우리는 능동적인 상태에 처하게 된다.
  • 이제 우리는 굴러 떨어지는 대신 암벽을 오를 수 있다.
  • 산에 지배당하는 대신 산을 지배한다.
  • 우리의 신체는 그때 더 큰 역량을 가지게 되며 더 유연해진다.
  • 신체는 더 많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고 환경을 신체의 본원적 요구에 더 많이 맞출 수 있는 것이다.
  • 신체는 환경을 감내하는 대신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게 된다.
  •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체와 외부 대상, 신체를 거스를 가능성이 있는 제약 조건에 대한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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