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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TC

[인문] 놀이: 인간성 증진을 위한 인문학적 과제

by 흠지니어 2020.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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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구성요소 중 존엄성에 이어 자율이 두 번째 요소이다.

자율은 스스로 성찰하여 규율을 만들고 이를 지키려 노력하는 것으로 인간의 긍정정인 면모이다.

하지만 결혼생활과 같이 물리적인 시공간을 공유하는 타자가 있을 경우,

타자와 관계할 경우 자율과 타율의 유사성 혹은 합의를 이루는 방식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상대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게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실천된 존엄성은 그리 흔하게 경험할 수 없는 만큼

존중감이 토대가 된 자율/타율 간의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최소 단위의 무리(부부)로서 생득 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가끔 가까운 사람과 한바탕 논쟁을 하고 난 후, 스스로를 돌아보면 '내가 상대를 존중하는가?'를 자문하곤 한다.

이러한 자문자답을 하고 나서야 오히려 문제가 풀려나가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도, 드라마를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것도 취미이고, 게임을 하는 것도 취미이다. 취미는 곧 놀이이다.

놀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활동으로 어떠한 책무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나의 놀이(비이성적인 활동) 활동을 가까운 사람에게 존중받고자(적어도 혐오치 않았으면..) 하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게임이 취미인 걸 굳이 숨기지는 않는다....😂)

 

참조문헌에서는 놀이 문화의 진작을 인문학의 과제라고 한다.

내용을 더 살펴보자.

참조 문헌: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인문학의 역할과 과제 -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

 

인공지능 로봇이 중추적 일꾼이 되고, 국민 기본소득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면 자연인은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자유 시간은 노는 시간이다. 자유 시간이 늘어날수록 놀이 문화는 발전하는 것이 이치이다. 놀이는 자유와 창의의 모관이자 인간성 고양의 발판이니 놀이가 문자 그대로 '재창조'가 되는 사회 환경을 조성하는 방책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동물들은 놀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들은 이미 기계적 사물 이상이다. 우리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갓된(=실속이나 보람이 없다) 이성적 존재자 이상이다. 왜냐하면 놀이는 비이성적인 것이니까."-요한 하위징아

기계들은 작동하거나 멈춰 선다. 노는 동물은 놀이로써 한갓된 기계가 아님을 증명하고,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은 인간이 이성적 동물에 그치지 않고 '웃는 동물(animal ridens)'임을 증명한다. 놀이는 계산기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이성적이지만, 그러나 놀이에 규칙이 없다면 난동이 된다는 저에서 놀이는 합법칙적이고, 그런 한에서 인간의 놀이는 지성적이다.

 

그리스어 어원에서 보듯 놀이는 '아이 짓함'이다.

이렇게 생각해 온 것은 놀이는 어떤 것을 목표로 하는 생산활동이 아니고, 어떤 책무성을 갖는 활동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놀이는 존재 연관성이 없다고도 말들 하는데, 그것은 놀이에서 어떤 것의 존재나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그런 의미에서 온갖 동물들은 이리저리 뛰논다. 아니, 자연 자체가 "아무런 목적과 의도 없이, 애쓰는 것도 없이 부단히 새롭게 시작하는 놀이"를 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물론 놀이는 존재에서 시작되고 촉발된다. 다만 놀이는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적당한 긴장 속에서 유쾌함과 재미를 얻으며, 멋과 아름다움에 이른다.

놀이는 "그 자신 만으로 쾌적한 작업"이다.

사람들이 지정된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은 노는 시간을 얻기 위해서이다. 일 마치자마자 달려가는 곳은 놀이터이다. 놀이는 유쾌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놀이에 그 이상의 목적 같은 것은 있지 않다. 만약 어떤 생산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또 다른 일(노동)이다.

 

놀이가 주는 쾌적함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놀이는 상상력에 의한 형상화와 의미부여에서 성립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놀이[유희]"가 독창성[원본성]을 낳는다. 그러니까 놀이를 이끄는 것은 자유와 창의이다. 놀이가 강제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놀이가 무질서하고나 무법칙적이지는 않다. 자유와 창의가 법칙성과 만나는 곳에 유쾌한 놀이가 있다. 곧 상상력과 지성이 합치하는 지점이 유쾌한 놀이의 자리이며, 바로 그 지점이 아름다움의 자리이기도 하기에 멋있는 놀이, 아름다운 놀이가 생긴다.

 

인간만이 아름답게 놀이할 수 있다.

인간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자라고 파악한 실러는 그래서 "인간은 그가 인간이라는 낱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인 곳에서만 놀이한다. 인간은 그가 놀이하는 그곳에서만 완전하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놀이야말로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 활동이다.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인간의 경우 그것을 '노동'이라고 일컫거니와)은 실은 뭇 동물도 한다. 무법칙적인 놀이야 개도하고 고양이도 한다 할 것이다. 합법칙적인 아름다운 놀이는 기예이자 예술로 진화한다. 인간의 놀이는 예술을 낳는 것이다. 인간만이 예술을 갖고 있다.

 

인간 외에 무엇이 소설을 쓰고, 시를 지으며,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영화를 만드는가!

소설이든, 시든, 악곡이든 회화든, 드라마든 실재에서 출발하되 실재를 떠난 곳에 있다. 그러니까 이런 활동들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활동이다. 인간은 실재 세계에서 살되 실재 세계를 떠난 곳에 머무는 존재자이니 말이다. 이제 실물과의 노동을 로봇에게 맡기게 되면 인간은 노동자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 바야흐로 "문명은 놀이에서 그리고 놀이로서 생겨나고 전개된다."

 

'제4차 산업혁명'이 인간에게 새로운 놀이 문명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휴머니즘의 진흥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노동자 인간, 일하는 동물이 유희하는 인간, 곧 예술가 인간으로 전환하는 터전을 제공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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