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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TC

[인문] 인문학의 역할: 자기 교화(敎化)

by 흠지니어 2020.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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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볼 수록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것 같다.

'인간의 특성이 이러하다' 라는 주장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나는 그러한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하다' -> '그러한가?' 의 사유를 반복할수록 스스로에 대해 자문자답 행위의 경험이 늘게 되고, 스스로를 더 알아가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참조문헌에서는 자기교화를 인문학의 역할이라며 논문을 결론 내린다.

참조 문헌: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인문학의 역할과 과제 -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

 

과학기술과 산업이 급진전할 때야말고 사람들의 인문학적 지성의 역할이 절실하다.

  • 달리기는 자동차에,
  • 날기는 비행기에,
  • 계산하기는 인공지능에,
  • 산업 노동은 로봇에 맡기면서,

인간이 하는 주요한 일은 이것들을 조정하고 이것들의 일들을 조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인간에게는 균형 잡힌 통찰력, 곧 온화한 지성이 필요하거니와, 이러한 지성은 기민한 지능과는 달리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의 화합에서 배양된다. ('제4차 산업형명'의 참 주역은 '지능적'인 사람이 아니라 '지성적'인 사람, 특히 인문적 지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지식이야말로 힘이다."(ipsa scientia potestas est)라는 매력적인 표어는 과학적 지식이 전근대적인 삶의 고초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의식주의 필수품을 구하는 데 매인 사람들의 삶에 자유와 여가를 줌으로써 충분한 신뢰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힘인 지식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데서도 세계의 주인들에게 순종하는 데서도 어떠한 한계도 알지 못한다."

 

힘인 지식은 타인을 지배하고, 자연을 개작하고, 시계를 정복하고, 수요가 있는 곳에서는 제한 없이 이용된다.

지식은 기술에든 자본에든, 권력에든, 전쟁이든, 가리지 않고 힘이 된다. 갈수록 자연과학이 대세로 자리 잡고, 진리로 찬양받는 것은 사람들은 자연과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한 자연[과 인간]을 이용하는" 지식=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위업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회과학 역시 '과학'을 표방하면서,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얻고자 한다. 그 반면에 인문학은 '인간' 즉 자아 주체(자기)를 다스릴 힘을 배양하는 데 뜻이 있다. 이를 일러 자기를 형성함(Bildung)이라는 뜻에서 교양(Bildung)이라 하는 것이다. 교양은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으로 만듦이다.

 

그런데 교양을 쌓기란 참으로 어렵다. 자연을 지배하고, 타인을 지배하는 것보다 자기를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타자를 지배하는 데서는 쾌감을 얻으나, 자기를 통제하는 데서는 고통이 따르기 십상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양의 학문, 인문의 학문이야말로 사람됨을 위한 기초 중의 기초로서 그만큼 더 막중한 소임을 갖는다 하겠다. 지능 증강, 인공지능 개발로 이어지는 도구적 지성능력 배양이 자연과 사회의 지배, 곧 타자 지배를 향해 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문명'사회가 배태하고 있는 폭력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교양, 자기 통제적 이성의 힘뿐이다. 최고도의 산업사회에서든, 포스트휴먼의 사회에서든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그를 굳건하게 해 줄 것은 그의 인문적 교양이다.

 

무릇 자연과학이 자연을 알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탐구하며, 사회과학이 타일을 알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법을 탐색하는 것이라면, 인문의 학문은 나를 알고 나와 함께 사는(나를 극복하는) 법을 성찰하는 데 참뜻이 있다.

인문 학문은 본디 타자와 거래할 것이 없는, 오로지 자기에 의한. '자기를 위한 공부[爲己之學]'이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도구적 이성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이라면 인문 학문은 입법적 이성의 힘을 강화시키는 공부라 하겠다. 여타의 동물들에서도 생존을 위해 인간의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상응하는 어떤 짓을 하는 양을 볼 수 있으나, 인문 학문에 해당하는 짓은 볼 수가 없다.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땅굴을 파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는 짐승들은 보여도 시를 짓고, 하루 일과를 돌아보며 행실을 뉘우치는 짐승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를 위한 공부', 입법적 이성의 힘을 배양함은 아마도 인간성의 특성 중의 특성일 것이다. 인문 학문의 공부는 향내(向內)적인 것인 것이니와, 인간만이 자신을 '이성적 동물'로 규정하고서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이 조탁을 필요로 하는 존재자임을 깨우치기 때문일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고 너 자신을 다스려라" 어느 시대에나 인문학의 역할은 이 경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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