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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TC

[칼럼] 논쟁: 돼지와 씨름하지 마라

by 흠지니어 202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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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논쟁을 30분만 해도 모든 진이 다 빠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논쟁의 시작은 '상호 간의 주장 중 어느 주장이 옳은 것인지 대화해보자'이지만, 단어에 포함된 다툴 쟁(爭)이 자체가 이미 다툼을 뜻하고 있다.

감정의 개입 없이 다투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논쟁은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거나, '지침'에 따른 '대화의 종료' 수순을 밟는다.

 

아래 논쟁을 주제로 한 칼럼이 있어 정리해봤다.

참조문헌: "사람들이 쇼핑 대신 섹스에 몰두하면 경제는 망한다" - 강준만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 "오랜 논쟁은 양쪽 모두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말이다. 
  • "논쟁으로 한쪽이 다른 쪽을 설득해내는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말이다.
  • "대화가 논쟁으로 치달았다면, 그 논쟁의 승패는 누가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의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는가에 달려 있다."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쇼펜하우어는 "한 명제의 객관적 진실과 논자 및 논쟁을 듣는 이들이 인정하는 타당성은 별개의 것이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바로 인간이라는 종족의 품성이 사악한 데서 온다. 인간의 품성이 사악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근본적으로 정직하다면, 우리가 먼저 제시한 견해가 맞는 것으로 낙착되건, 다른 사람의 견해가 맞는 것으로 낙착되건 상관없이, 모든 쟁론은 오로지 진실을 드러내는 쪽으로 귀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쪽이 옳으냐 그르냐는 대수롭지 못한, 지극히 부차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논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주된 본건이다. 허영심은 이성의 능력에 대해서 특히 민감하다. 우리는 이 타고난 허영심 때문에 우리가 먼저 제기한 견해가 틀리고, 상대의 견해가 옳다고 결론이 내려지는 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악하다'는 건 지나친 표현일망정, 논쟁에 임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허영심이 강하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니 논쟁에 임하거나 논쟁을 구경할 때에 논쟁은 '허영심끼리의 충돌'이라는 점을 염두해 둔다면, 필요 이상으로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게다. 사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똑똑하다는 허영심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왕자병이나 공주병에 걸린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 어린아이의 강점은 부끄러움을 전혀 모른다는 데에 있으니까 말이다.

 

"방울뱀이나 지진을 피하듯 논쟁을 피하라."

미국의 처세술 전문가 데일 카네기가 '인간관계론'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12가지 비결' 중 첫 번째 비결로 제시한 해법이다. 그는 논쟁을 피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쟁은 열이면 아홉이 결국 참가자가 자신의 의견에 대해 전보다 더 확신을 갖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사람은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 논쟁에서 지면 당연히 지는 것이고, 만약에 이긴다고 해도 그 역시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일까? 자, 당신이 상대방의 허점을 찾아 그가 틀렸음을 입증해서 이겼다고 치자.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물론 당신이야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방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당신은 상대방이 열등감을 느끼게 했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는 당신의 승리에 분개할 것이다."

 

"돼지와 씨름하지 마라." 서양 속담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돼지와 씨름을 하면 둘 다 더러워지는데 돼지는 그것을 좋아한다." 이와 관련, 캐나다 철학자 조지프 히스는 "더 합리적이 되라는 설교에 대중이나 미디어가 응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적 논증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은 매우 허약하고 쉽게 소진된다. 편향과 틀린 신념에 잘 빠지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며 미디어의 탓으로 쉽게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디어가 일조한 부분도 있겠지만 미디어는 우리 사회에서 이성적인 논쟁이 점점 더 어려워지게 만드는 더 큰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히스는 좌파의 입장에서 우파 선동가에게 반응하는 것을 좌파 선동가들이 할 게 아니라 코미디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동가와 진지한 논쟁을 하려 드는 것은 지는 게임이며, 상대방의 견해만 부각시키고 당신 견해의 격만 떨어뜨릴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상대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전술로 반격을 하는 것은 효과도 없을뿐더러 자기 파괴적이다.

이럴 때 해법은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이서은 비이성과 같은 링에서 싸울 수 없다.

그래서 비이성적인 상대와 마주쳤을 때 가장 좋은 전략은 그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에 코미디가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자고로 계몽주의에서 풍자가 큰 역할을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백 가지 꽃이 일시에 개화하도록 하고 백 가지 생각이 서로 다투도록 하라." 이른바 '백화제방백가쟁명'으로, 중국의 마오쩌둥이 1956년 4월에 처음 내건 슬로건이다(이 슬로건은 1970년대 후반에 다시 큰 주목을 받았다). 지적 논쟁이 새로이 꽃피도록 하자는 요청이었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지식인들이 늘 겉 다르고 속 다른 마오쩌둥의 이중성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가 젠보짠은 지식인들이 계속 입을 다물기로 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오의 호소가 진실한 것인지 아니면 의례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인지 지식인들은 조심스럽게 따져보아야 했다. 이 호소가 진실된 것이라 해도 과연 꽃이 어느 정도까지 피어도 되는지, 또 일단 꽃들이 만개한 다음을 생각해보아야 했다. 이 호소가 그 자체로 목적인지, 아니면 (숨은) 생각을 드러내게 한 다음 그 생각을 교정하려고 꺼낸 수단인지 지식인들은 생각해보아야 했다. 또 지식인들은 논의할 수 있는 문제와 논의할 수 없는 문제가 어떤 것들 인지도 추측해야 했다."

 

자유로운 민주국가라고 해서 '백화제방백가쟁명'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건만, 우리는 늘 논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각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가 사실상 '논쟁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건만, 우리는 논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왜 그럴까?

 

"어떤 이슈에 대한 공개적 논쟁은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결과를 수용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비록 그 결과가 최적 정책에 관한 그들의 생각에서 벗어난 것 일지라도" 미국 정치학자 머리 에덜먼이 '상징적 행위로서의 정치'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논쟁이 기존 질서 정당화의 도구로 이용되는 걸 꼬집은 것이다. 그 질서에서 안전과 평화를 누리는 우리로선 논쟁은 "나는 하지 않겠지만, 너는 해야 하는 것"이라는 해법을 찾은 셈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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