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ETC

[심리] 권위주의: 왜 일상에서 권위주의는 건재할까?

by 흠지니어 2020. 11. 13.
반응형
'너무 권위주의적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부모, 직장 상사, 교수, 교사, 선배 등등 주로 윗사람을 향해 발설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그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어떤 유형일지 대략 짐작을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 '권위주의적 성격(authoritarian personality)'이라는 말도 널리 쓰인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스타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성격 자체가 권위주의적이라는 뜻이다.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하건 그런 취지의 말은 아마도 인류와 말 탄생 이래로 쓰인 것이겠지만, 비교적 학술 체계를 갖춘 용어로서 '권위주의적 성격'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유대인으로 독일계 미국 학자인 에리히 프롬(1900~1980)이 1941년에 출간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파시즘의 인간적 기초가 된 인격적 구조로 다룬 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논의가 아닌가 싶다. 

 

우리 인간은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보호와 권위에 의존하는 삶을 살다가 자립할 때에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자유가 부담스러워진다.

이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보호와 권위를 찾게 되는데, 이렇듯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권위에 기대려는 심리 상태가 바로 '권위주의적 성격'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프롬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권위주의적 생각의 공통적인 특성은 삶이 자기 자신, 자신의 관심, 자신의 소망 등이 아니라 그 밖에 있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확신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힘에 굴종하는 데 있다. ...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오는 용기란 본질적으로 운명 또는 그의 상관이나 지도자가 그에게 요구한 것을 견뎌내는 용기다. 그 괴로움을 끝내거나 적어도 완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용기는 금물이다. 불평 없이 견디는 것이 최상의 미덕이다. 운명을 바꾸지 않고 운명에 복종하는 것이 권위주의적 성격의 영웅주의다."

 

이어 테오도어 아도르노등은 1950년에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책은 "편견을 '사회적 질병'으로 정의함으로써 정치 언어를 의학 언어로 갈아치우고 논란을 빚는 범한 사안들을 철학적/정치적 토론거리가 아니라 진료소로, '과학적'연구의 대상으로 강등"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연구 방법론 못지않게 그런 시각으로 접근한 연구의 내용도 논란이 되었다. 아도르노 등은 나치에 가담해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인간형'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하고 이들은 특별한 종류의 인간 집단으로 보았다. '잠재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개인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크문트 바우만(1925~2017)은 아도르노의 주장이 평범한 인간들도 나치스가 자행한 잔혹한 행동을 할 가능성을 배제한 논리라고 비판했으며, 존 스타이너도 아도르노가 상황적(사회/문화/제도적) 요소들의 영향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어빈 스타움은 잠재적인 폭력적 성격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에게만 잠재해 있는 것 아니라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통된 특징의 하나라고 보았다.

 

심층적인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 스탠리 밀그램과 필립 짐바르도의 연구는 '사람'보다 '상황'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런 주장이나 이론을 가리켜 '상황주의(Situationism)'라고 한다. 사람의 특성이 아니라 상황이 중요하고, 영혼보다는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악의 상황 이론'이라고도 하는데 그 반대는 '악의 기질 이론'이다.

 

'악의 상황 이론'이 강세를 보이면서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쇠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버트 스턴버그와 카린 스턴버그는 1998년에 출간한 "우리는 어쩌다 적이 되었을까?"에서 "아도르노와 그 동료들의 연구는 오늘날 자주 언급되지는 않는다. 한때는 거의 모든 심리학 입문서에 인용되었던 내용이지만 오늘날에는 책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모든 심리학 연구가 그렇듯이 이 연구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이미 너무 오래된 연구이기 대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우리 인간이 모든 것을 빨리 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와 동료들의 연구는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시의성 있는 연구이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 실제로 그들의 연구는 절대로 잊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프롬과 아도르도가 파시즘의 발호와 유대인 학살이라고 하는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거시적이고 야심찬 의욕을 보인 것이 문제였다는 점을 인정하는 선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은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으면서 권위주의자들의 성격을 밝히려는 시도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2011)라는 책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 불평등, 위계질서, 신분 차이를 용인하고, 사람을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로 나누어야 한다고 믿을 뿐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인구 집단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영국 심리학자 애드리언 펀햄은 "권위주의자는 복잡성, 혁신, 새로움, 모험이나 변화를 옹호하는 대상을 혐오한다. 갈등과 의사 결정을 싫어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과 욕구를 외부적인 권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규칙, 규범, 관습에 복종하며 다른 사람들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세계를 정리하고 통제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그는 단순하고 경직된, 즉 융통성이 없는 법이나 도덕, 의무와 규칙, 과제를 좋아한다. 이런 성향은 예술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투표를 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프롬과 아도르노 등이 제시한 역사적 성격의 개념과는 무관하게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논쟁은 주로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범죄를 저질러 법의 심판을 받을 때 일어난다. '악의 상황 이론'을 믿는 사람들은 상황의 특수성을 들어 비교적 낮은 처벌을 주장한다. 2004년 바그다드의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미군 2명이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재판에 피고를 변호하는 전문가 증인 자격으로 참여햇던 짐바르도는 이 재판에서 느낀 '좌절감'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검사와 판사는 상황의 힘이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들의 견해는 우리 문화 속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표준적인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어떤 잘못은 전적으로 개인의 '기질적'문제며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른 것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합리적인 의사결정 이라는 것이다."

 

좋은 말씀이긴 한데, 짐바르도는 검사와 판사의 생각이나 고민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다. '악의 상황 이론'을 수용하는 것과 이 이론을 곧장 법에 적용하는 건 좀 다른 문제가 아닐까? '악의 상황 이론'을 법에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자를 둘러싼 상황이 진짜 범인이기 때문에 그 어떤 잔혹한 범죄라도 엄벌 자체가 어려워진다. 검사와 판사는 그건 곤란하다는 입장일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점을 들어 엄벌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일반 대중도 이런 입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악의 상황 이론'과 관련해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운 점은 이 이론의 선별적 적용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법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에게 관대한 경향이 있다. '유전무죄/무전유죄'의 관행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나라가 많다.

이런 사람들의 범죄에 대해선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게 '악의 상황 이론'이 적용된다.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것이지, 짐바르도가 개탄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아니다.

 

법의 이런 불의를 잘 알고 있는 보통 사람들은 권력과 금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도 '악의 상황 이론'을 배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법이 '가진 자의 범죄'와 '가지지 못한 자의 범죄', 또는 '화이트칼라 범죄'와 '블루칼라의 범죄'에 대해 차별을 두지 않고 엄정하게 처벌하는 정의를 실현한다면, 그때 가서야 비로소 '악의 상황 이론'을 포용할 수 있는 심적 여유를 갖게 되지 않을까?

 

범죄 이야기라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직장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몹쓸 갑질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악의 상황 이론'을 믿는 부하는상사가 처해 있는 현재 상황은 물론 어린 시절의 성장 상황까지 고려해가면서 판단을 해야 하는가? 설사 그런 고려를 하더라도 그 상사의 갑질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그 상사에게 묻는 게 잘못된 일일까?

 

옳건 그르건 우리는 이런 경우 별 고민 없이 갑질을 저지른 사람에게 갑질의 책임을 묻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갑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중요한 건 갑질을 저지르는 상사를 둘러싼 개인적인 상황이라기 보다 회사 전체, 더 나아가 사회 전반의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이 생존 경쟁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한다면, 제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져달라고 등을 떠밀어도 그런 성격을 가질 리 없다. 무슨 수를 서서라도 스스로 고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가? 왜 '갑질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갑질을 저지르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생존 경쟁에 도움이 된다는 걸 말해주는게 아닐까?

 

조직 생활에서 널리 떠도는 속설 가운데 "잘해주는 사람보다 못살게 구는 사람에게 잘 하려고 애쓴다"는 말이 있다. 물론 약자의 처지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처세술 메커니즘은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그런 토양에서 자라나는 독버섯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권위주의 시대는 갔다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권위주의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이기도 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