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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TC

[심리] 평등편향: 왜 의사결정에 인간관계가 개입할까?

by 흠지니어 202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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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 뿐 편향된 인지를 한다.

흔히 말해 '여우의 신포도' 우화 역시 르상티망 이라는 인지편향의 일종이다.

특정한 사고뿐만 아니라 다자간 대화에서도 인지편향이 작용되는데,

다자가 참여한 대화에서 나오는 특징은 발언을 함에 있어 분위기를 고려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독서토론 모임을 4년 째 해오고 있는데, 모임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크게 2가지 특징이 있다.

  • 한정된 시간내 진행하므로, 다수의 인원에게 발언시간을 1/n하여 공평하게 나누려는 성향이 있다.
    (말이 많은 누구 하나에게 발언시간을 독점하는 것 자체가 불공평 해 보이기 때문이다.)
  • 특정인이 틀린 정보를 이야기해도 매우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보통은 그냥 넘어간다.
    (특정인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하는 의견 혹은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하고, 그로 인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저하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심리도 역시 인지편향의 일종이며 (평등편향)이며, 해당 이론을 소개한 논문이 있어 요약정리 한다. 

(모든 학자들은 참 부지런 한 것 같다.)

원문 참조: 왜 우리는 의사결정과 인간관계를 뒤섞는가? - 강준만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본 포스팅의 요약 및 구성은 아래와 같다.

  • 평등 편향의 예시 및 정의: 대화 참여자들의 수준 차이에도 누구에게나 공정한 시간과 관심을 할애하려는 성향
  • 평등 편향 관련이론: 집단사고(GroupThink), 에빌린 패러독스(Abilene Paradox)
  • 평등 편향 해소방안: 집단의 다양성 추구
  • 현대의 평등 편향 사례 및 고찰: 온라인의 공격성 ("선비질 하지 말아라")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그런 자리의 성격은 다양하다. 친구, 직장 동료, 동호회, 가족끼리 등등.. 이야기를 좀 하다보면 각자의 성향과 수준이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무슨 토론대회도 아니므로 친소관계를 막론하고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반론은 삼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정을 따른다. 이 과정에서 특정 주제에 대해 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단순히 말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발언을 하기 마련이다. 그 말은 말 많은 사람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주장을 한다면 다행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주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속으론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비웃을망정 그걸 밖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그저 가벼운 사교행위로 주고받는 말잔치에 정색을 하고 나서는 게 오히려 점잖지 못하다고 핀잔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선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늘 역할은 정해져 있다. A와 B는 특정 주제에 대해서건 만나기만 하면 말로 싸우고, C는 화제를 전환시킴으로써 그 말싸움을 뜯어말리기에 바쁘다. A와 B 가운데 A의 말이 옳더라도 A와 B를 동등하게 다루어야지 행여 A의 편을 들었다간 그 자리의 분위기를 망칠 우려가 있다. 물론 A의 편을 들면서 B에게 면박을 주는 그런 격의 없는 친구들의 모임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B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수긍하는 법은 없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내버려두지 않고 연구의 주제로 삼아 '평등 편향(equality bias)'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특정 주제에 대한 각자의 수준 차이에도 누구에게나 공정한 시간과 관심을 할애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걸 가리키는 개념이다. 알리 마흐무디 등은 2015년 이런 '평등 편향'이 집단 의사 결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자신의 주장을 더 옹호하는 경향이 있고, 오히려 더 실력있는 사람들이 상대편의 주장이 분명히 틀렸을지라도 그걸 존중해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틀리거나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음으로써 존중을 받기 원했고, 실력이 우월한 쪽은 자기가 늘 옳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국제정치학자 톰 니콜스는 '전문가와 강적들: 나도 너만큼 알아'라는 책에서 '전문가의 죽음'과 관련된 이런 '평등 편향'에 주목하면서 "이런 태도나 행동은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내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어떤 결정을 하기에는 정말 나쁜 방법이다"라고 우려한다.

 

단순한 사교행위가 아니라 무슨 결정을 내리기 위한 자리라면 사람들이 달라지지 않을까? '평등 편향'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할 말은 다 하지 않을까? 그게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사교행위에서 작동했던 '존중받고 싶은 욕구'와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싶지 않은 배려'의 버릇은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똑같이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평등 편향'과 비슷한 현상인 '집단 사고(Groupthink)'나 '에빌린 패러독스' 고나련 연구에서도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집단사고'는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어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사고의 경향"인데. 집단 내의 화합적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는 강한 욕망이 주요 원인이다. 케네디 행정부의 피그스만 침공사건,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정책, 닉슨 행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좋은 예다.

 

  '집단 사고'의 한 유형인 '에빌린 패러독스'는 아무도 원치 않았는데 만장일치의 합의로 나타난, 즉 누구도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안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 역시 조직 구성원 개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 걸까?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그로 인한 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 편향'은 그간 '집단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중의 하나로 제시되어온 '집단 구성의 다양성'에 대해 부분적인 수정을 요구한다.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만장일치'가 쉽게 이루어질 가능성을 높게 만드는 연고주의와 패거리주의를 배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다른 시각을 제시할 수 잇는 조금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능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사람들로 집단을 구성해도 좋은가? '평등 편향'은 그건 위험하다는 답을 제시한 셈이다.

 

  디지털 시대는 어떤 주제에 대해 많이 알건 적게 알건 자신이 아는 것보다 많이 아는 척을 하는 경향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평등 편향'의 전성시대를 불러왔다. 이른바 '인정 투쟁'이 격화되면서 "우리는 마치 우리가 박식한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것에 가까운 위험한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댓글 세계에서 그런 위험한 상태에 도전하면 곧 날아오는 반격은 "선비질 하지 마라"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엔 정작 '선비질'을 해야 할 때에 하지 못한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지만, 언제까지 개인적 오류마저 사회적 푸옽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니콜스는 이런 의문에 답하고 싶었던가 보다. 러시아 문제 전문가인 니콜스는 SNS에서 러시아에 관해 자기를 가르치려 드는 '비전문가'들에게 화가 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가 "전문가와 강적들"이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누구나 똑똑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전문가들의 의미 있는 조언을 더이상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 퀴즈셔 <지오파디!>에서 다섯 차례 우승하기도 했던 그는 이렇게 개탄한다. "사람들이 아직도 나의 다른 약력보다 지오파디 우승에 더 큰 박수를 보낸다. 역시 TV에 나와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니콜스의 푸념은 '선비질'이라는 비판에 내재된 편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 비판은 충분한 근거가 있는 반-엘리트주의거나 반-전문가주의지만, 모든 엘리트나 전문가가 다 똑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나 기업계의 거물들은 다른 대접을 받는다. 혹 '평등 편향'이 강한 사람들일지라도 스스로 알아서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들어가기 때문은 아닐까? 뭔가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채 단지 말과 글만을 통해서 누군가의 우위에 서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정서야말로 디지털 세계를 지배하는 반-지성주의의 본질이 아닐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오늘도 이야기판이 벌어지는 어떤 자리에서건 모든 참여자가 평등해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쓸게 틀림없다. 평등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런 자리만이라도 평등이 관철되는 성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우리의 암묵적 합의인 셈이다. 그런 합의가 중요한 의사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지만, 평등이 신구러처럼 저 멀리 달아나는 세상에서 그런 성역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할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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