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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TC

[심리] 모호성 기피: 왜 "호구조사"를 하려고 하는가?

by 흠지니어 2020.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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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중에 서양에서는 동양에 비해 낮선사람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인사를 하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그게 눈인사든 목례던 형태는 중요치 않다. 
그 이유가 상호간에 "나 당신에게 위험한 사람이 아니에요"을 알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확실히 심야에 엘리베이터에 낮선사람과 동승하였을 때, 목례를 한 것과 하지 않은것은 극명한 (동승자의 불확실성으로 인한)불안함의 차이를 가져올 것 같다.

 

나도 종종 혼자 유럽으로 출장겸 여행을 가곤 하는데, 유랑같은 곳을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번개 모임을 하는걸 볼 수 있다. 

나 또한 현지투어를 구할 때 한국인 가이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낮선 곳에서의 자유'도 누리고 싶지만 가끔은 '익숙한 문화의 사람들'과 식사라도 하면서 릴렉스 하고자 하는 마음도 공존하는 것 같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회피하려는 심리를 연구한 사례가 있어 아래 정리했다.

 

원문 참조: 왜 우리는 의사결정과 인간관계를 뒤섞는가? - 강준만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한국인들은 첫 만남에서 상대방에 대한 호구조사에 들어가길 좋아한다. 나이, 고향, 출신 학교, 직장, 결혼 여부, 자녀 수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알아내고야 만다.

프라이버시 존중 의식이 높아지면서 그런 호구조사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 역시 그런 사람중의 하나다. 그런데 금방 문제가 있다는 걸 절감했다. 호구조사를 끝내면 나눌 이야기가 많아지는 반면, 호구 조사 없인 이야기를 끌어나가기가 영 쉽지 않았다.

 

비교적 호구조사를 하지 않는 서양인들도 그런 답답함을 느꼈나보다. 1975년 미국 커뮤니케이션 학자 찰스 버거는 "인간관게의 시작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며 '불확실성 감소 이론(uncertainty reduction theory)'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일반적인 인간관계가 처음 이루어지는 단계에서 상대방에 대한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이론이다.

 

상대방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불확실성을 못 견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걸 비교적 잘 견디거나 오히려 즐기는 사람도 있다. 내가 관련 서적들에서 뽑아본 아래 8개 진술의 대부분 또는 전부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인지적 종결욕구'가 강한 사람으로서 전자의 유형(불확실성을 싫어하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나는 삶이 질서정연하기를 바란다.
  • 나는 자유와 개성보다는 규칙을 좋아한다.
  • 나는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 나는 추상화보다 정물화와 같은 구체적인 그림을 선호한다.
  • 나는 언행이 예측가능한 사람을 좋아한다.
  • 나는 신속하게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명확한 판단을 선호한다.
  • 나는 모호한 상황에선 불편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싫어한다.
  • 나는 생각이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증거나 의견을 고려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인지적 종결 욕구'는 미국 사회심리학자 에어리 쿠르굴란스키가 1993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이는 어떤 질문에 대해 모호함을 피하고 어떠한 답이든 확고한 답을 원하는 욕구를 말한다. '인지적 종결 욕구'가 강한사람은 보수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국처럼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흑백논리가 성행하는 사회에선 이념과의 관련성을 따지는게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정도는 문화건에 따라서도 다르다. 네덜란드 사회심리학자 기어트 홉스테드는 1991년에 출간한 문화와 조직 이란 책에서 불확실성 회피 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이는 한 문화의 구성원들이 불확실한 상황이나 미지의 상황으로 인해 위협을 느끼는 정도를 의미한다. 이게 강한 문화권의 사람들은 "다른 것은 위험하다"고 보는 반면, 약한 문화권의 사람들은 "다른 것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불확실성은 사회과학 분야에서 다양한 시각과 방법으로 다루어져온 주제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모호성 기피(ambiguity averson)'라는 개념도 비슷한 이야기다. '불확실성 기피'라고도 부르는 모호성 기피는 사람들에겐 잘 판단할 수 없을 때 위험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걸 가리키는 개념이다. "악마에게 당하더라도 모르는 악마보다 아는 악마가 낫다"는 서양 속담이야말로 '모호성 기피'의 슬로건이라 할 수 있겠다.

 

모호성 기피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21년 확률론에서 처음 밝혔고, 이어 데니얼 엘스버그가 1961년 논문에서 대중화시킨 이론이다. 나중에 신경학자들이 가세해 우리의 두뇌 자체가 모호한 상황을 싫어한다며, 이 점을 외면한 경제학의 '합리적 선택 이론'은 전면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심리학자 지오라 케이난은 '모호성 기피'성향과 미신적 행위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모호성에 대한 포용력'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이 '마술적 사고' (=미신을 믿음)를 더 많이 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실험에서 개인의 교육 수준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불확실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한 방식으로 미신적 행위를 더 많이 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 직업이 어부, 군인, 프로스포즈 선수들이다.

한국에선 프로야구 선수들의 그런 마술적 의식을 가리켜 '징크스'라고 부르는데, 몇 개 소개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이승엽은 홈런을 쳤을 때 입었던 유니폼을 밤새 다시 세탁해 다음 날 경기에 입었다. 박진만은 안타가 나오면 매 타석에서 같은 배팅 장갑을 착용하고, 안타를 치지 못하면 바로 장갑을 바꾸었다. 홍성흔은 코치가 자신의 장갑에 王자를 써준 후 타격감이 좋아지자 이후에 계속해서 장갑에 王자를 새겼다. 투수인 이태양은 선발 등판 당일에 방을 대청소한다.

 

사람들의 '모호성 기피' 성향으로 인해 정치인들은 딜레마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신의 주장이나 공약을 분명하게 제시할 경우 확실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유권자들도 있지만 동시에 등을 돌리는 유권자들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특히 갈등의 소지가 큰 이슈에서 더욱 그렇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인들마다 선택이 다르긴 하지만, 그간 일반적인 법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부분의 정치인이 택한 전략은 모호성을 껴안는 것이었다.

 

미국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앤서니 다운스는 "민주주의 경제적 이론"에서 2개 정당 체제하의 후보자들은 폭넓은 유권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의 차이를 극소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벤저민 페이지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유권자들의 표를 잃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슈를 모호하게 제시할 것이라며, 이를 '정치적 모호성 이론'으로 명명했다. 현(곧 내려올)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이런 원칙을 깬 예외적인 인물이지만, 그간의 미국  정치가 '정치적 모호성 이론'을 신봉해온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의도적인 모호성은 국가 간의 외교관계에서 많이 쓰이는 전략이자 정책이기도 하다. 이를 가리켜 '전략적 모호성' 이라고 한다. 행위 주체가 특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위험 부담을 더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의도적 모호성 또는 전략적 모호성 이라고도 한다.

 

문학에서는 조지 오웰이 이를 비판했다. 1984에서 '더블스피크'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로 '가치 체계의 전도'를 일으켜 사실상 속임수를 저지르는 언어유희를 말한다. 오웰은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대개 정치 언어는 에둘러 말하기, 논점 회피,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기 등으로 이루어진다. 무방비 상태의 마을이 목격을 당해서 주민들이 낯선 곳으로 내몰리고 가축들이 기총소사에 몰살당하고  불을 뿜는 총탄이 삶의 보금자리를 불태우는 상황이 '평정'이라고 불린다. 수많은 농부들이 농토를 빼앗긴 채 보따리르 이고 지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피난길에서 헤매는 상황이 '인구이동'또는 '국경수정'이라고 불린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정작 분명함이 필요한 영역에선 모호성이 판을 치고있고, 모호성을 존중해주어야 할 영역에선 모호성을 기피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으니 말이다. 모호성을 찬양하는 '퍼지식 사고(fuzzy thinking)'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이는 주로 공학이나 기업 경영에만 적용될 뿐 우리의 일상적 삶에선 여전히 대접을 받지 못하는 '흐리멍텅함'으로 폄하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 특유의 적당주의나 대충주의는 한국을 '퍼지 사고력의 천국'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고 있지만, 우리는 일을 처리할 때에만 그럴 뿐 사회적으로 '다름'을 대하는 자세에서 적당주의나 대충주의를 적용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관용이라는 말을 즐겨 쓰지만, 사실 관용의 핵심은 '모호성에 대한 포용력'이 아닐까? 상황에 따라 분명함을 요구하거나 모호성을 포용하는 분별력을 갖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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