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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인문] 조롱: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

by 흠지니어 202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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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북마크 해둔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조롱'편을 필사한다.

 

평소에 일을 못 하나고 자신을 갈구는 직장 상사가 사장에게서 무능하다는 질책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혹은 똑똑한 척하는 얄미운 후배가 웬만한 사람도 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때도 우리는 속으로 웃음을 참기도 한다. 아니면 성인군자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밥맛 떨이지게 행동했던 어느 지식인이 치명적인 스캔들에 빠질 때, 우리의 마음은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흥분되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조롱이라는 감정이다.

이렇게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할 때, 우리는 잠시 기쁨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네. 너도 별 수 없는 인간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이 기쁨을 속으로만 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남의 불행에 기쁨을 표시하는 순간, 엄청난 불이익이 생길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이럴 때 능숙한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 유리할 뿐만 아니라 내심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테니 말이다.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라. 내심 조롱을 아끼지 않고 있던 내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이럴 때 희열이란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처럼 조롱이라는 감정에는 무엇인가 병적인 데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를 업신여기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우리는 미움과 슬픔의 상태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들에게 불행과 불운이 찾아든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은 잠시 기쁨에 젖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기쁨 아닌가. 마치 오아시스 하나 없는 사막을 배회할 때 하늘에서 찔끔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비와도 같다. 그렇지만 한 방울의 비에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아예 사막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 미워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그 사람의 불행을 보며 기쁨을 느끼는 것(=조롱) 보다, 미워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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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까? 가장 철학적인 고양이 한 마리가 맥주에 취해 물독에 빠져 비범한 삶을 마쳤다는 사실을. 위대한 철학자들보다 더 냉철했던 고양이 선생은 속속들이 인간을 탐구하는 도중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도대체 인간들은 왜 술을 마시는지 그는 정말로 알고 싶었다. 그러니 몸소 술을 마실 수밖에. 비극은 이렇게 호기심에서 생기는 걸까?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물독에 빠져 세상만사에 작별을 고한 것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을 이해했던 고양이가 죽은 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인간들 중 가장 고양이에 가까운 인간 한 명이 고양이의 비범한 삶과 도저한 사유를 기록할 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다. 이렇게 탄생한 소설이 1907년에 완간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다. 모든 것은 거리를 두어야 제대로 음미될 수 있는 법.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직시하기 힘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우리에겐 고양이의 철학적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고양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단순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울 때는 죽어라 하고 운다. 게다가 일기 같은 쓰잘머리 없는 것은 절대 쓰지 않는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자신의 속내를 풀어놓아야겠지만, 우리 고양이 족은 먹고 자고 싸는 생활 자체가 그대로 일기니 굳이 그렇게 성가신 일을 해 가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존해야 할 것까지는 없다. 일기를 쓸 시간이 있으면 툇마루에서 잠이나 즐길 일이다. (...) 나는 얌전히 앉아 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 재미있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움직이면서, 재미있지도 않은 일에 웃고 시답잖은 일에 기뻐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주인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성품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평소 말수가 적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 얘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내 주인이 한층 더 같잖게 느껴졌다.

 

고양이로서는 정말 인간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혜로운 동양인들은 지행합일을 외치고, 동시에 지혜로운 서양인들은 이론과 실천의 합일, 혹은 변증법적 종합을 이야기한다. 지금 인간들 스스로 자신이 앎과 삶이 괴리된 존재라는 것을 토로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미 지행합일이 되어 있다면 그것을 꿈꾼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놀라운 것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지행합일이 되어 있고, 이론과 실천이 변증법적으로 통이로디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인간은 고양이 선생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을 존경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지행합일도 되지 않았으면서 인간은 지행합일이 이루어진 동물들을 열등하다고 조롱하며, 심지어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뻐기고 있다. 정말 웃기는 일 아닌가.

 

배가 고프면 늑대는 닭을 잡아먹는다. 지행합일이다. 그러니까 배가 고픈 것을 아는 순간, 동물들은 무엇인가를 먹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떤가? 배가 고픈 것을 알아도 생명 존중이든 다이어트든 간에 어떤 괴상한 이유를 들어 번뇌하면서 음식을 바로 먹으려고 들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먹지 않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먹는다는 점이다. 얼마나 쿨하지 못한가. 고양이 선생의 눈에는 인간의 행태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닭처럼 살아있는 생물을 죽이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몸서리를 치지만, 배가 고프면 어김없이 패스트푸드점이나 통닭집에 들어가 닭을 뼈까지 발라 먹는 인간이. 심지어 이렇게 닭으로 배를 채운 뒤, 포만감에 트림을 하면서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인간들은 침을 튀기며 생명 존중을 역설하곤 한다. 얼마나 위선적이고 아이러니한 일인가.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은 너무나 가식적이고 복잡하다. 고양이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바람 부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세미처럼 초연한 척하고 있지만 그 마음속에는 세속적인 명예욕도 있고 욕심도 있다. 그들의 평소 대화에는 남을 이기려는 마음과 경쟁심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터라, 여차하면 그들이 늘 욕을 해대는 속물과 한통속이 될 우려도 있으니 고양이인 내가 보기에도 안쓰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니, 혹은 겉과 속이 괴리되어 있으니, 인간은 일기 같은 글을 쓴다. 진솔한 글을 통해 순간적이나마 겉과 속을 일치시키려는 발버둥인 셈이다. 지행합일이 되어 있는 고양이 선생은 결코 일기 같은 건 쓰지 않는다. 일기란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했거나, 혹은 실천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쓰는 것이니까.

 

아! 그렇다.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과 문화란 어쩌면 이렇게 겉과 속이 불일치하는 상태와 그것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종횡으로 엮이며 만들어진 것인지도. 바로 여기에 고양이, 다시 말해 나쓰메 소세키의 탁월함이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신랄한 조롱도 이 정도면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주장하니 정말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인간의 지적인 허위의식이란 정말 눈뜨고 못 봐줄 일이다.

 

주인이 이 문장을 높이 평가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교에서 '도덕경'을 존경하고, 유교에서는 '역경'을 존경하고, 선불교에서는 '임제록'을 존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자니 답답하니까 멋대로 의미를 갖다 붙이고는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고양이의 냉소적인 웃음, 혹은 소세키의 허허로운 웃음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웃음이란 반응은 조롱이라는 감정을 토대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조롱이란 어떤 내적 논리로 움직이는지 좀 더 깊이 음미하기 위해 스피노자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자. 

 

조롱이란 우리가 경멸하는 것이 우리가 미워하는 사물 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조롱은 묘한 감정이다. 그것은 미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들이 미워하는 인간 속에서 그들의 불합리와 위선을 발견하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세키=고양이'는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가장 경멸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고양이족을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폄하한다. 고양이보다 못하면서 고양이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런 인간 족속만큼 고약한 존재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반면 고양이의 장점을 단점이라고 단정하며 으쓱거리는 건 정말 꼴불견이다. 그만큼 소세키는 자신도 한 마리의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간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에서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간파한 다음, '고양이=소세키'는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제 당당히 인간을 조롱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이 풍기는 유머감각의 씁쓸함이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양이와 가깝다고 해도 소세키는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결국 인간에 대한 고양이의 조롱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조롱일 수밖에 없다. 이런 냉소적인 자기 조롱은 얼마나 허무하고 자기 파괴적인가? 고양이가 물독에 빠져 죽은 것이나, 소세키가 고질적인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정말로 정직하게 직시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고양이 선생의 통찰과 가르침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고양이 선생의 예리한 유훈을 우리에게 알려 준 작가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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