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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인문] 자긍심: 정체성 - 밀란 쿤데라

by 흠지니어 202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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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북마크 해둔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자긍심'편을 필사한다.

사랑이라는 건 상대의 장점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랑을 토대로 사랑을 받는 타자는 자신의 장점을 볼 수 있고, 그것은 자긍심 함양의 계기가 된다.

누군가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준 경험 혹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험을 한 번쯤 상기해봐도 좋겠다.

 

우리는 평생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타자는 너무나 쉽게 내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간혹 이렇게 말할 것이다. "머리에 뭐가 묻었네요. 이리 와서 돌아봐요, 제가 털어 줄게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상의가 바지에서 빠져나와 있으면 나는 어김없이 그에게 그 사실을 일러 준다.

 

이건 뒷모습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면을 타자는 마치 거울처럼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사실 거울보다 수백 배나 더 좋은 요술 거울이 바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거울이 현재의 시각적인 모습만 비추어 준다면, 타인은 과거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도 보여줄 수 있고, 심지어 나의 내면마저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던 장점을 보여준다면, 나는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대로 나의 단점을 보여 준다면, 나는 우울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 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자신에 대해 자긍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애인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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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다. 장 마르크는 자신의 작은 행동이 거대한 폭풍우를 낳게 되는 나비의 날갯짓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동거하고 있는 연상의 연인 샹탈이 어느 날 애잔하게 토로했던 슬픔이 사건의 시작이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 함께 살고 있는 남자에게는 너무나 무례한 이야기일 수 있다. 나는 그럼 남자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만 장마르크는 아직도 샹탈을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애써 치미는 질투의 감정을 삭이고 나서 그는 샹탈의 슬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장마르크는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모든 여자는 노화의 정도를 남자들이 자기에게 표출하는 관심, 혹은 무관심을 척도로 가늠한다."라고. 그래서 장마르크는 스스로 미지의 스토커가 되기로 결심한다.

 

물론 그렇다고 장마르크가 직접 샹탈을 스토킹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좌우지간 샹탈을 짝사랑한다는 가상의 인물은 신원불명 이어야만이 그녀에게 스토커로서 각인시킬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샹탈에게 편지를, 그러니까 그녀를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마침내 나비의 날갯짓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마르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편지가 샹탈의 삶, 나아가 둘 사이의 관계에 얼마나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를,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다른 편지들도 속속 들이닥쳤고 샹탈은 그것을 점점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편지는 지적이며 점잖았고 조롱하거나 장난기도 전혀 없었다. (...) 그것은 유혹이 아닌 숭배의 편지였다. 혹시 저기에 유혹이 있었다면 장기적 안목으로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방금 받은 편지는 보다 대담했다. "사흘동안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았을 때 너무도 가뿐하게 위로 떠오르고자 갈망하는 당신의 모습에 나는 경탄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춤을 추며 위로 솟구쳐야만 하는 불꽃을 닮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늘씬한 몸매로 당신은 경쾌하고, 디오니소스적이고, 도취한 듯한 야만적인 불꽃, 그 불꽃에 둘러싸여 있더군요. 당신을 생각하며 나는 당신의 알몸 위에 불꽃으로 엮은 외투를 던졌습니다. 당신의 하얀 육체를 추기경의 주홍색 외투로 가렸습니다. 이렇게 가린 당신의 몸, 빨간 방, 빨간 침대, 빨강 추기경 외투, 그리고 당신, 아름다운 빨간 당신이 눈에 선합니다!" 며칠 후 그녀는 빨간 잠옷을 샀다.

 

자신의 편지를 받은 샹탈의 변화에 장마르크는 당혹스럽게만 하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혹은 누군가가 찬양하고 숭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샹탈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 진주 목걸이가 아름답다고 쓰자 장마르크의 선물이지만 너무 화려하다며 자주 착용하지 않았던 진주 목걸이를 자랑스럽게 걸고 외출하는 것이다. 빨간 옷을 언급했더니 샹탈은 빨간 잠옷을 입고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여자로 변신한다. 지금 샹탈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진주 목걸이를 싫어하던 여자에서 좋아하는 여자로, 붉은색 옷을 경멸하던 여자에서 붉은색을 좋아하는 여자로 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샹탈을 찬양하는 스토커의 편지 내용이 전적으로 그녀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찬양과 숭배의 편지를 쓰기 위해 장마르크는 예전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샹탈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스토커의 편지, 그러니까 장마르크의 편지는 샹탈로 하여금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매력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스포트라이트가 샹탈에게 엄청난 자기만족, 혹은 자긍심이라는 감정을 부여한 것이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보석이 있는지를 알았을 때,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대로 자긍심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에만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법이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샹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 마련이다. 자긍심은 얼마나 매력적인 감정인가. 길거리를 걸을 때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레드카펫을 걷는 여배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거칠 것 없는 아우라를 뿜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자각하고, 그래서 자긍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모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샹탈이 받은 스토커의 편지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숭배자가 없다면, 자긍심을 갖기란 너무 힘든 법이니까.

 

그렇다, 장마르크는 제대로 오판한 것이다. 연상의 동거녀 샹탈이 자신의 노화를 걱정했던 것은 아니다. 샹탈의 우울과 슬픔은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감정이 연기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긴,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이로 전락하는 순간이 바로 자긍심을 잃는 시점일 것이다. 물론 그녀의 자긍심을 뺏은 주범은 동거남 장마르크 본인이 아니었던가.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을 때, 그녀로서는 자긍심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장마르크가 보낸 스토커의 편지가 의미심장하다. 비록 동정심과 연민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스토커의 편지는 샹탈에게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아 주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연애편지가 샹탈만이 아니라 장마르크의 '정체성'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장마르크가 샹탈의 매력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장마르크는 샹탈을 숭배했고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여러 모로 많이 변모한 샹탈을 새롭게 사랑하게 된 남자로 변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스토커로서 편지를 쓰기 위해 장마르크는 지금까지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샹탈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가정에서 그는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었던 연인의 매력,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얻게 될 새로운 변화들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새롭게 찾아낸 샹탈의 모습에서 장마르크는 자신의 가슴에 사랑이, 과거와는 다른 색깔의 사랑이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낀 것이다.

 

스토커의 편지가 장마르크가 보낸 것이라는 사실이 들통나자, 화를 참지 못한 샹탈은 순간적이나마 그를 떠나 버린다. 같이 있던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 때에야 뒤늦게 자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샹탈과 장마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두 남녀는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두 연인이 다시 런던에서 재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겠다. 우여곡절 끝에 화해를 한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할 때 마침내 알게 된다.

사랑은 서로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 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소설 '정체성'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애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그리고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이었다.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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