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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소설] 진이, 지니 - 정유정

by 흠지니어 202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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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게된 계기: 요즘 통 소설은 읽지 않았는데, 무심결에 회사 도서관에 들렀다가 추천받은 소설이 보이길래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다. 마음따뜻해지는 소설이라며 정유정 작가를 얘기했을땐 내가 읽어본 작가의 저서는 종의기원뿐이라 따뜻함은 잘 연상이 되지 않았다.

 

사건을 끌고나가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 이진이-침팬치 사육사 겸 연구자 이력이 있는 독일 유학 직전의 여성
  • 김민주-특별히 잘나지도 모나지도 않은 백수
  • 지니-??

진이,지니와 민주의 시점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있고,

지니의 감각을 이진이가 추론에서 직접감각 혹은 이해에 이르기까지 점점 동일시 되어가는 형태로 전개된다.

소설 속 현실의 우울함이 시니컬한 문체와 특유의 유머로 흥미롭게 풀어져 나간다.

우울함을 이해시키는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책장 넘기는 속도를 더했다.

 

민주와 지니는 각자의 이유로 트라우마를 갖게 되고 그 트라우마를 계기로 삼아 현재까지와는 다른 결심/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휘말린 사건에서 두 등장인물은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모습이 나타난다.

 

몇몇 기억에 남는 문장을 인용하고 포스팅을 마친다.

 

'눈동자의 말'은 주로 배가 고프거나, 상처가 났거나, 위험에 처했거나, 곤경에 빠진 동물들이 보내오는 신호였다. 때로는 평화로운 침팬지관에서도 들린다. 그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을 잘 안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가 인간이라는 점도 안다고 말한다. 싫고 무서워도, 자신이 살려면 인간으로 하여금 손을 내밀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서늘하고 처연한 말이 나를 사육사로 만들었고, 사육사를 그만두게도 만들었다.

 

사육사에서 연구자로 진로를 바꾸는 게 출세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만은 맞는 얘기였다. 나는 스승처럼 되고 싶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바로 스승이 가는 길이었다. 내가 하고싶은 일이 바로 스승이 하는 일이었다. 이 간절한 욕말을 단칼에 잘라버린 것이 킨샤사의 아이었다. (이상하게도 니체의 영원회귀가 연상됨.)

 

(클락션 소리를 들은 민주)그게 어쨌다는 건데. 달려가 구조 활동이라도 벌이시게? 머릿속에서 이죽대는 목소리가 울렸다. 한 쌍의 젖꼭지처럼 모차르트와 나란히 붙어사는 '간장종지'의 목소리였다. 종종 그래왔듯 아버지 목소리를 흉내 내 한마디 덧붙였다. 그냥 거기 가만있어. 뭘 하려 들지 말고.

 

장례를 도운 건 닥터K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었다. 시신을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망할 놈의 '어이'인지 '아이'인지 때문이었다. 발화한 소리가 무엇이었든 거기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해병대 누인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요청을 들은 누군가가 그걸 외면했다는 것, 누군가의 외면으로 목숨, 혹은 살아날 기회를 잃었다는 것, 그 누군가가 바로 나라는 것.

 

(한기준의 10절까지 잔소리를 한 대목 이후) 한기준은 그러기를 바란다고 응수했다. 참고 사항이라며, 저 위 도로와 영장류센터가 있는 산등성이에 보노보를 잡으러 온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붕어 낚시를 왔다 해서 잡힌 메기를 놔주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후 내용엔 결국 백발의 경찰에게 붙들려간다.)

 

시간이 고통스럽게 흘러갔다. 나는 지니가 기억하는 것들, 내가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쳤던 것들과 재회해야 했다. 지니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내겐 기억을 피할 길이 없었다. 외면할 방법도 없었다. 지니를 향해 손가락 총을 쏘는 나와 내 손가락으 구원처럼 붙드는 지니와 지니의 손을 가차없이 뿌리치고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꼼짝 없이 지켜봐야 했다. 나를 향한 지니의 절망적인 부름을 들어야 했다. 한 남자가 나타나 길쭉한 막대기로 허벅지를 찔러버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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